여행을 다녀오면 머리가 똑똑해진다는 심리 연구
삶이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고,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시기일수록 우리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집니다. 단순히 기분 전환 때문일까요? 아니면 뇌가 진짜로 변화를 필요로 하는 걸까요? 최근 과학자들이 이 질문에 주목했습니다.
최근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의 Shu Cole 박사 연구팀은 여행이 노년층 정신 건강과 인지 기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는 대규모 종단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는 단순히 ‘여행은 좋다’는 감정적 결론을 넘어, 인지 기능 유지와 감정 안정에 대한 실질적인 근거를 밝혀냈습니다.
연구팀은 미국 전역의 50세 이상 성인 약 20,000명을 대상으로 4년에 걸쳐 설문조사와 인지 기능 검사를 실시했습니다. 참가자들은 얼마나 자주 여행을 하는지, 어디로 떠났는지, 여행 중 어떤 활동을 했는지 등을 보고했고, 동시에 외로움, 우울감, 인지 기능 점수를 정기적으로 측정받았습니다. 연구의 핵심은 단순히 “여행을 다녀왔다 vs 안 다녀왔다”는 이분법적 측정이 아니라, 여행 빈도와 여행 거리, 그에 따른 정신 건강 지표의 변화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이전에는 확인하지 못했던 더 구체적인 내용들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연령, 성별, 교육 수준, 경제적 조건 등 여러 변수를 통제하면서 실질적인 인과 관계를 정밀하게 확인하는 연구였습니다.
1. 여행을 자주 다닌 사람일수록 인지 기능 점수가 높았다
연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발견은, 여행 빈도와 인지 기능 간의 유의미한 상관관계였습니다. 즉, 자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일수록 기억력, 언어유창성, 주의 집중력 등 다양한 인지 기능 지표에서 높은 점수를 보였습니다. 연구진은 이를 ‘새로운 자극에 대한 뇌의 반응’으로 해석합니다. 여행은 매 순간 새로운 환경, 경로, 언어, 문화, 일정 등을 처리해야 하기에 뇌가 활발히 작동하게 됩니다. 단순한 길 찾기, 물가 계산, 현지인과의 짧은 대화 같은 것도 모두 전두엽과 해마를 활성화시키는 인지 과제입니다. 또한, 낯선 환경에서 계획을 세우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노화로 인한 인지 감퇴를 늦추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뇌의 ‘운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머리가 맑아진다”는 느낌의 생물학적 기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여행을 많이 할수록 외로움과 우울감 수준이 낮았다
또 하나의 주요 발견은, 여행 빈도가 높을수록 외로움과 우울감이 현저히 낮게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지 '재미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는 차원의 감정적 반응이 아닙니다. 여행은 실질적으로 정서적 고립을 완화하고, 사회적 연결성을 회복시키는 데 기여합니다. 심리학적으로 외로움은 단순한 ‘혼자 있음’이 아니라, 타인과 정서적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주관적 경험입니다. 여행 중 우리는 다양한 사람을 마주하게 됩니다. 비행기에서 옆자리 사람과 나누는 짧은 대화, 현지 식당에서의 작은 에피소드, 또는 함께 여행을 떠난 사람과의 특별한 추억이 우리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다시 일깨웁니다. 게다가, 연구에서는 혼자 사는 사람, 은퇴한 사람, 배우자를 잃은 사람일수록 여행의 효과가 더 크다는 결과도 확인되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우리 부모님들 세대에 여행이 정서적 공백을 메우는 심리적 자원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또한 이를 우리가 활용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3. 여행을 ‘멀리’ 갈수록 효과는 더 컸다
놀랍게도, 단순한 주말 나들이보다 국내외 장거리 여행을 한 사람들이 인지 기능과 정서적 안정 면에서 더 뚜렷한 효과를 보였습니다. 가까운 장소는 어느 정도 익숙하고 예상 가능한 반면, 멀리 떠나는 여행은 그 자체로 예측 불가능성과 복합적 자극을 동반합니다. 새로운 문화권, 타국 언어, 생소한 교통 시스템은 우리의 뇌가 더 집중하고 더 많이 배우도록 유도합니다. 이는 뇌의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을 자극하여, 새로운 신경 회로망이 형성되고 기존 회로의 강화에도 영향을 줍니다. 또한 먼 여행은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 거리를 넓히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아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며, 삶의 재해석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은 단순한 ‘기분 전환’을 넘어서, 정체성의 회복과 통합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멀리 여행을 가는 건 젊은 사람들에게도, 나이 든 사람들에게도 자아-정체성의 관점에서 매우 좋은 효과를 줄 수 있습니다.
여행은 삶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뇌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우리에게 한 가지 명확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여행이 단순히 휴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행은 뇌를 깨우고, 존재감을 회복하는 심리적 재활 공간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반복을 경험하며 삽니다. 같은 길, 같은 사람, 같은 대화 속에서 뇌는 점점 느려지고, 감정은 무뎌지고, 삶은 반복됩니다. 하지만 낯선 길을 걷고, 처음 보는 언어를 마주하고, 예상치 못한 사건을 겪는 순간 뇌는 다시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런 환기가 기억력을 높이고 정서적 유대감을 느끼며 더 명확하게 “나”를 느끼도록 돕습니다. 그러니 여행은 뇌를 젊게 만들고 똑똑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출처
Cole, S., Zhang, Y., Park, S. H., & Ragatz, L. (2024). Exploring the relationship of leisure travel with loneliness, depression, and cognitive function in older adults. Annals of Tourism Research, 103677.